화요일, 11월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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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여성주의 감독이 영화 안팎으로 연대하는 법

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응하지 않는 초대들

작년과 올해는 한국 영화의 경사 같은 시간으로 회자된다. (물론 영화산업을 비롯한 문화계 전반이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을 겪기 전까지의 얘기다.) 한국 영화 100주년이던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고, 이듬해인 올해 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을 포함 무려 네 가지 부문에서 수상했다. 수상소감을 네 번이나 해야 했던(?) 봉 감독의 재치 있는 부문별 언변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였다. 2020년은 ‘외국어 영화상’ 부문의 이름이 ‘국제 영화상’으로 바뀐 첫 해이기도 한데, 그는 이 부분 역시 콕 짚고 넘어간다. “그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있는데, 오스카가 추구하는 그 방향에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 어쨌거나 그날 밤, 봉 감독은 단일 작품으로는 세계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 네 개를 거머쥐었다.

1996년 오스카에서도 ‘최초의’ 기록이 쓰였다. 마를린 호리스(Marleen Gorris) 감독 작품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의 외국어 영화상 수상이 그것이다. 국제 영화상이 아직 외국어 영화상일 때, 이 부문에서 여성 감독으로는 최초로 수상한 사례다. 무조건적으로 ‘최초’를 찾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호리스 감독을 이야기할 때 이 수상 기록을 언급하지 않기는 섭섭할 것이다. 마를린 호리스 감독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유럽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를린 호리스 감독 Rob Bogaerts, Nationaal Archief / Anefo


나는 학부시절 재개봉한 <안토니아스 라인>으로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광화문 씨네큐브 1관 어딘가에 앉아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맺지만 곳곳에 웃음이 터져 나오고, 강간과 폭력이 전개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함에도 전체적으로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은둔하는 염세주의 철학자와 모녀 4대가 대화를 나누던 장면들은 또 어떤가. 빠른 전개의 낯섦과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몇몇 장면에도,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안토니아스 라인> 국내 개봉 포스터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1970년대 네덜란드는 ‘돌러 미나(Dolle Mina)’라는 페미니스트 단체를 중심으로 “Bass in eigen buik”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Bass in eigen buik”은 Boss of own belly, 자신의 배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My body, my choice”와 맥락을 같이 하는 슬로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당시 활발히 진행되었던 여성해방운동의 물살을 타고 곧이어 1982년 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입봉작인 <침묵에 대한 의문>이 개봉한다. (네덜란드어 원제는 크리스틴 M. 을 둘러싼 침묵이라는 뜻의 <De Stilte rond Christine M.>인데, 번역된 영문과 국문 제목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빠졌다.

네덜란드 언론에서는 피고인의 성을 다 쓰지 않고 첫 철자 뒤에 점을 찍어 표기하는데, 영화의 내용상 이는 꽤 상징적인 장치다.) 이 작품을 포함해 호리스 감독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맡은 작품은 총 네 편인데, 이는 감독이 애초에 어느 정도 계획해 두었던 바라고 한다. 이후로는 <안토니아스 라인>의 성공 덕에 나쁘지 않았던 제작환경을 발판 삼아, 소설 각색 및 타인의 시나리오로 또 네 작품의 연출을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그것들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실현하고, 할 얘기를 다 했으니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그 결단마저도 참 다부지다. 이제 그녀는 더는 영화를 만들지 않지만 이미 세상에 꺼내어진 네 편의 이야기는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을 것이다. “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언제나 무언가가 남기 마련이지.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자라난단다.” 안토니아가 증손녀 사라에게 들려주었던 말처럼.  

마를린 호리스 감독은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본인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을 즐기지 않아 세계 곳곳에서의 초청을 대개는 반려하는 편이라고. 직접 출두한 극히 드문 예 중 하나가 바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던 6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귀한 수상소감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시상자는 멜 깁슨.) 플롯과 메시지가 뚜렷하고 표현 방식이 꽤나 직설적인 그녀의 영화 세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런(?) 성격에도 그런(?) 작품 활동을 했다는 건 엄청난 재능과 강렬히 통감한 필요성, 그리고 그 둘을 뛰어넘는 용기의 합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안토니아스 라인> 스틸컷. 안토니아의 정원에서 사람들이 함께 식사하는 장면들은 참 사랑스럽다.

그녀가 응하지 않은 수많은 초청은 그대로 반려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본인이 참석하지 않는 대신 호리스 감독은 그녀 주변의 여성 영화인을 보내 대리 참석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실로, 한국에서도 지난 몇 년간 호리스 감독을 초청하고자 하는 영화제가 몇 있었다. 하지만 연로하신 당신의 건강상의 이유로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녀의 회고전이 열렸던 한 영화제에서 내가 만난, 네덜란드 영화를 연구하는 당신의 지인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그녀가 보여준 공동체 의식과 연대는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하진의 브런치 중에서


작가소개 : 이하진

일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월요일은 두려운, 냉소적 낭만주의자. 네덜란드를 사랑한 문화예술 애호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해 적습니다.

기타 이력 및 포트폴리오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 문정관
삼성미술관 Leeum 영어 도슨트
(전) 서울대학교 미술관 도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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