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1월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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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아무데도 가지 않고, 그 무엇도 하지 않는

오늘 여행의 목적은 엉뚱하게도 ‘빨래’였다. 말 그대로 10여 일간 묵혀두었던 빨랫감들을 해치워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마침 일요일이었고, 특별히 목적지도 없어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나와 같이 설거지를 한 후에 신랑은 세탁실의 위치도 확인할 겸 캠핑장을 한 바퀴 뛰고 오겠다며 숙소를 나섰다.

나는 빨래할 옷들을 분리해놓고, 촬영해둔 영상들을 정리했다. 신랑은 땀에 흠뻑 젖어 돌아왔지만, 끝내 세탁실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체크인할 때 받은 지도를 펼쳐 놓고서 세탁실 표시가 된 지점에 가보았느냐고 나는 물었고, 신랑은 가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생각보다 캠핑장이 너무 크고 넓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서, 우리는 그 넓은 캠핑장을 헤매고 다녔다. 길이 대부분 흙길이거나 자갈길이어서, 지도에 난 길이 그 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침내 세탁실을 찾아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이제 난생처음 보는 기계와 맞닥뜨리는 일이 남아 있었다. ‘외국 세탁기도 뭐 별 다를 게 있겠어?’ 하던 내 예상을 조롱하듯, 거대하고 단단해 보이는 기계는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일단 버튼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우리나라 가전제품처럼 기호나 그림 같은 것도 없이 글자만 적혀 있어서 도무지 무엇을 눌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동전은 넣었는데, 그다음부터는 막막했다.

나는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번역 앱을 이용해 마침내 작동 버튼을 찾고 눌렀다. 그런데 옆에 있는 거대한 건조기에는 도무지 동전이 들어가지 않았다. 분명히 체크인 카운터에서 빨래를 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세탁기에 넣는 동전 두 개를 받아서 왔는데, 건조기에는 동전조차 들어가지 않아 이상했다. 다른 사람에게도 물었지만,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별 수 없었다. 나는 체크인 건물로 뛰어가 다시 물었고, 직원은 건조기용 코인은 따로 있어 그걸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 구입하라고 제안했을 때 왜 구입하지 않았느냐며 그는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그제야 나는 첫날 빨래를 하기 위해 코인을 구입할 때, 직원이 ‘드라이클리닝’을 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에게 내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드라이클리닝 코인을 받아 들고 세탁실로 돌아왔다.

드라이클리닝 동전을 넣자, 그제야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거대한 건조기를 보며, 우리는 다시 또 작아졌다. 여행이란 결국 작아지는 일이고 작아진 나를 깨우치며 다시 또 커지는 일이구나 싶었다. 오늘은 정말 ‘빨래’라는 참으로 의미 있는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빨래가 되는 동안 우리는 캠핑장 입구의 반대편 숲길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굵고 큰 나무들이 양옆에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마치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해 열린 길 같았다. 수북이 낙엽이 쌓였고, 오독오독 발밑에 나무 열매가 밟혔다. 신발 밑창에 작고 동그란 열매가 닿는 느낌, 온 힘을 다해 내 무게를 버티는 작은 열매의 안간힘, 그러다가 마침내 발밑에서 퍽 뭉개지는 감촉.

산나무 열매들이 발아래 뭉개지고 한 해를 살아낸 마른 잎사귀들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다가 신랑은 갑자기 두 팔을 활짝 펴고서 우리 앞에 열린 길로 나풀거리며 뛰어나갔다. 새의 몸짓을 흉내 내듯 새처럼 날갯짓도 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신랑의 뒷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다가 이번에는 신랑에게 스마트폰 카메라를 내맡기고서 내가 두 팔을 활짝 펴고 이리저리 춤을 추며 뛰었다. 뛰다가 시큰해진 무릎을 두드리면 내 뒤에서 스마트폰를 든 신랑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다시 신랑은 나에게 스마트폰을 맡기고서 두 팔을 펴고 날갯짓을 하며 뛰었고, 뛰다가 바닥에 가득한 낙엽을 끌어 모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에게 내던졌다. 또다시 나도 신랑에게 스마트폰 카메라를 맡기고서 낙엽을 끌어 모아 그에게 던졌고, 신랑과 나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인적 없는 호젓한 산길에서 우리는 그렇게 마음껏 뛰고 날았다.

그날은 분명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여행을 모두 끝낸 요즘도 그때 그 순간이, 그 뜀박질이 자주 생각난다. 신랑은 빨래를 가지러 가는 길에도 캠핑장에 마련된 아이들 놀이터에 뛰어들어 나무로 된 놀이기구를 타며 아이처럼 좋아했고, 나 역시 신랑을 따라 놀이기구를 타려다가 넘어져 모랫바닥에 주저앉았다. 신랑은 또 그런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런 신랑을 보고서 씩씩대며 환하게 웃었다.

빨래는 끝났지만, 힘들게 건조기에 돌렸던 빨래들은 완전히 마르지 않았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빨래들을 가짜 벽난로 앞에 주욱 늘어놓아 말렸고 그 앞에서 우리의 몸도 말렸다. 꿉꿉한 냄새가 풍기는 숙소 안 가짜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우리는 몸은 물론 마음속까지 뽀송뽀송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여행의 한가운데였다.

길을 잃어 여행 갑니다 중에서

박조+비 부부의 다른글 보기 : 반고흐 미술관, 죽어가는 꽃의 빛깔


박조+비 부부

일상 드로잉 작가 박조건형과 소설가 김비
처음 손잡은 지 10년, 동거인이 된 지 5년,
법적 보호자가 된 지 3년, 부부 작가가 된 지 2년.
각방 예찬론자이지만 서로의 귀 마사지로 하루를 시작하는
희극이거나 비극이거나 일상이 예술인 부부.
같이 쓴 책으로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가 있으며
드로잉 유튜브 채널 <박조비TV>를
‘게으르게’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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