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1월 24, 2020
Home 네덜란드 이야기 암스테르담, 그 남자의 맨발

암스테르담, 그 남자의 맨발


나는 그가 완벽한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라 직감했다.

암스테르담 도로변 화랑에서 맨발의 남자를 발견했다. 살바도르 달리로 추정(?)되는 사진을 아이패드에 띄워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입구에 멈춰 섰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북적이던 거리 소음이 사라지면서 눈 앞의 공간이 마치 세상의 전부가 되는 듯했다. 나는 그가 완벽한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라 직감했다.


어떻게 이렇게 가까울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가까울 수 있지?’ 자그마한 화랑은 거리의 일부 같았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길거리로 나가지도 못한 채 입구에서 숨을 고르며 그를 지켜봤다. 한쪽에는 보라색 꽃이 핀 화분과 마시다 남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맨발 아래에는 갖가지 물감이 줄지어 있었고, 주름진 소매는 대충 걷어 올려져 있었다. 겨우 걸터앉은 듯한 나무 의자는 짙은 물감 냄새가 배어 나오는 듯했다. 차분한 그의 모습과 달리, 그림 속 남자는 ‘뭘 보냐?’ 하며 곧 튀어나올 것 같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부러웠다.

그는 얇은 붓으로 눈가의 주름을 터치해 나갔다. 다른 그림들도 저렇게 그린 걸까? 화랑의 주인인가? 적막 속에서 외로움이 밀려왔다. 동시에 평화로웠다.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 전체가 ‘예술’로 느껴졌다. 삼 십분 넘게 기다려서 들어간 고흐 박물관보다 더 전율을 느꼈으니까.(반 고흐 뮤지엄, 암스테르담)

나는 끝내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조용히 사진 한 장을 찍고 도망치듯 길거리로 나와버렸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다. 그가 부러웠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맨발’로 그림을 그려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 ‘휴가 없는’ 첫 자유여행

자유인. 암스테르담은 퇴사 후 ‘휴가 없는’ 첫 자유여행이었다. 당분간은 모아 놓은 돈으로 지내야 하는 백수가 된 것이다. 지나온 생활들을 정리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던 시간이다. 그래서 그에게 그림 그리기가 ‘생계를 위한 것’인지 자유로운 ‘예술 활동’ 일지 무척 궁금했다. 둘 다였을 수도 있다. 뭐가 되었던지 외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의 ‘맨발’이 이 모든 걸 설명하는 듯했다. 나는 환상 속을 거니는 듯한 그 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조건: 노동, 작업, 행위

‘꿈을 위해 퇴사했어요’라는 말이 허망한 건 이 사회에서 생계유지만큼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도 벌고 싶다는 고민은 언젠가부터 ‘망상’이 된 듯하다. 열심히 일해도 어딘가 허한 느낌이 들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살기가 힘든 건 우리를 충족시켜야 할 무언가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를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세 가지 근본 활동으로 정리하고 있다. 노동(labor)은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작업(work)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예술 활동’이다. 행위(action)는 다양한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활동을 말한다. 나는 아렌트 관점에서 세 가지를 한 공간에서 충족시키는 사람이 이 남자가 아닐까 멋대로 짐작해 보았다. 


그가 그림 그리기를 정말 사랑하는 예술인이라면

(거리 상점에서 만난 강아지, 암스테르담)

그러니까 만약에, 그가 그림 그리기를 정말 사랑하는 예술인이라면 그림을 팔면서 넉넉하지 않더라도 생계유지를 할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니까 정부 지원도 있겠지(?). 또 그는 길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그는 예술 활동 속에서 노동과 작업을 병행할 것이다. 자신의 취향과 사람들이 사가는 그림이 다를 때도 분명 있을 테다. 하지만 거리에서의 소통은 세 가지 근본 조건을 다시금 균형 있게 정돈해 줄 것이다.


나도 맨발로 살 수 있을까?

(아침으로 먹었던 미니 더치 팬케이크, 암스테르담)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적당한 빛, 물감 내음이 진동하던 공간 속에서 열중하던 뒷모습만이 남았다. 어쩌면 내 또래였을 그는 연출된 삶이 아닌 진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 하나만으로 암스테르담은 내게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나도 맨발로 살 수 있을까? 휴대전화 사진을 넘기며 그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어니연 작가의 삐뚤어진 여행기 중에서

어니연 작가 브런치 보러가기

데일리NL 후원하기

인기 글

네덜란드 생활팁 리스트

리스트에 없는 내용은 댓글 남겨 주시면 업데이트 하겠습니다!네덜란드에 정착 하실 분들을 위해 수정 사항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네덜란드 오기 전 필요한 물품 리스트!네덜란드 한인 교회,...

네덜란드 한인 교회, 한인 성당 알아보기!

오늘 주제는 "네덜란드 내 한인교회, 한인 성당" 입니다. 자, 한번 알아볼까요? 1. 암스테르담 화란 한인 교회             암스텔베인에 위치한 화란 한인 교회...

네덜란드 택배의 모든 것

요 몇년간 이 나라 저 나라를 옮겨다니면서 택배를 참 많이도 주고 받았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우체국에 갈 일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중고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팔때...

네덜란드에서 봉사활동 하기

네덜란드에는 정말 많은 봉사활동 기회가 있는데요, 네덜란드 사람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한 봉사활동들도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non-dutch speaker로서 네덜란드에서 봉사할...
error: 불펌 금지 입니다!